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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첸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6) : 전통적인 종교들의 한계, 종교에 대한 미래의 정의

린첸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6) : 전통적인 종교들의 한계, 종교에 대한 미래의 정의

 

 

질문5. 모든 진리는 같은 것이라는 전제 하에 기질이나 여건, 인연에 따라 기독교, 혹은 이슬람 또는 불교 이렇게 각자 종교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도 충분한지

      

현대의 포용적인 태도를 갖춘 지식인들이나 종교인들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종교는 동일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서로 다른 길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를 통해서든 동일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나 불교, 힌두교 같은 여러 종교를 두루 접하면서, 그리고 그런 종교들에서 가르치는 주제들에 대해서 사유하고 비교하고 종합하면서, 위와 같은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그런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현대의 균형 잡힌 건전한 지성인의 한 특징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나름의 방식으로 동일한 진리에 도달한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관용과 포용을 실천하기 전에, 우리는 기독교, 불교, 혹은 힌두교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혹시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불교와 같은 종교의 핵심적 교리의 대부분은, 오랜 세월 동안, 거의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사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던 인물들에 의해서 주장되고 체계가 세워졌습니다. 그런 인물들은 보통, 그 종교의 교조와 매우 가깝거나(예를 들면, 교조가 살아있었을 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 경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예를 들면, 특별한 영적 경험을 통해서 교조를 신비적으로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이고, 그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교조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믿을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권위를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조 자신의 직접적인 가르침보다는, 그런 사람들의 해석과 체계에 더 권위를 부여하게 되고, 교조의 모든 가르침은 그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조 자신보다, 그 교조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사람의 권위가 더 부각되면서, 교조는 상징적이고 전설적인 존재로만 남고, 실제로는 후대의 특정인의 해석이 교조의 가르침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런 결과가 되면, 특정인의 해석에 근거한 교리체계를 비판하는 것은, 곧 교조 자신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은 곧 그 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지금 현대의 종교들에서 그런 현상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무아론을 비판하면 부처의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예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의 원죄설대속설을 비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불편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도 역사적으로 인정된 매우 뛰어난 인물들이 인정하고 공감한 교리에서 어떻게 문제점을 찾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동일한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갖추고 있고, 그러므로 어느 종교든 동일한 진리에 이른다.”는 말은, “모든 종교가 서로 다른 진리를 주장하고 있고, 그러므로 각각의 종교는 동일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라고 바꾸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들리고, 실제로 각 종교의 주류 종교인들은 그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특정 종교의 성직자나 학자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포용적인 경우는, 많은 경우에, 자신이 대변하는 종교에 다른 종교를 부속시키는 관점에서, 혹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관점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 수행자나 성직자가 기독교의 사랑의 가치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귀함은 인정하지만, 불교의 무아론이나 공성을 깨닫지 않고는 절대로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기독교 성직자나 신학자가 부처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명상적 접근방식과 지혜는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결코 하느님의 지혜에는 도달할 수 없고, 절대적인 신적 존재만이 완전한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신적 존재에 의해서만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제한된 범위에서 타 종교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진리에 이르는 나름대로의 길이고, 어느 길을 통해서든 동일한 진리에 도달한다.”라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현재 당연시하는 각 종교의 교리가 진정으로 교조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극히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특정한 상황의 산물인지 물어야 합니다. 만약에, 각 종교의 핵심적 교리가 교조의 가르침에서 매우 많이 벗어나 있는 교리라면, 무엇인가 큰 문제점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한 포용과 관용은 진리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원의 타협과 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타협과 관용도 매우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한 해석과 체계가 쌓이면서 견고해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에 새겨지게 되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어느 한 곳으로 흐르게 되어서 물길이 생기게 되면, 계속 그 방향으로 흐르듯이, 인류의 종교적 관념과 믿음도 그렇게 견고해지고 경직되면서, 그것에 어긋나는 어떤 비판이나 문제제기도 수용하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각 종교의 교리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습니다.

 

DK 대사는, 미래에는 지금까지의 어떤 종교학자들이 시도했던 것보다도 더 정확한 의미의 종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는 인류의 기원하는 호소더 위대한 생명이 그 외침으로 일깨워져서 반응하는 것에 부여된 이름이다.”

Religion is the name given to the invocative appeal of humanity and the evocative response of the greater Life to that cry.

 

이 말은, 시대마다 인류의 염원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시대마다 더 위대한 생명의 반응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염원도 절대적이지 않고, 그것에 대한 어떤 위대한 생명의 반응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종교는 제한된 진리의 표현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진리의 표현이고, 미래의 어느 시기에, 혹은 다른 차원에서 거짓이 될 수 있는 진리를 대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DK 대사에 따르면, 인류 앞에는 무한한 진화의 과정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인식되는 진리는 무한한 확장과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과거의 종교들이 범한 큰 실수가 있다면, 인간의 영적 발전을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보다 높은 종교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린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6-07-18 (월) 18:29 11개월전
지금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안에서 그동안 믿고 신봉한 체계가 사실은 잘못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구조가 있을지...일단 종교라고 하면 그 어떤 체계(도그마)가 세워지면서 익숙해지는 건데,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면 그건 무척 어려울 듯 합니다.(이단이라거나 분명 배척되는 논란이 일듯) 그나마 불교에서는 부처님 스스로 자신의 말도 이치에 맞을때만이 신뢰하라는 가르침의 전통이 있고, 특히 중관의 가르침에서는 스스로 주장함이 없이 모든 것의 비논리성을 거꾸로 밝히는 방법등으로 기존의 설을 해체하고 있으므로 그나마 우리가 의지할 만한, 진리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있는 체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체계도 절대적일 수는 없고 더 나은 설명과 시도가 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하겠지요. 정성이 가득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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