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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첸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4) : “운명론”과 올바른 세속적 삶

린첸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4) : “운명론과 올바른 세속적 삶

 

 

질문3. 우주의 대 마스터(스승)의 전승체계는 불교에서의 대일여래로부터 각 보살들의 지위와 매우 비슷하여 그다지 놀랍지는 않지만... 신지학의 목적이 신의 의지로 인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면, 예정된 운명설, 어차피 그렇게 진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인가요? 개인의 노력은 사실 개미의 그것과 같이 아주 미미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개미도 불성이 있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겠지만 세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신지학에서 바라보는 건강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DK대사의 가르침 안에서 설명하면, 현재 대부분의 인류는 크게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인성자아personality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

둘째, 인성자아를 형성한 사람.

셋째, 인성자아가 수동적으로 영혼Soul의 에너지에 반응하고 있는 사람.

넷째, 인성자아와 영혼을 능동적으로 조율시키고 있는 사람.

다섯째, 인성자아와 영혼을 조율시킨 사람.

 

위의 분류를 살펴보면, “인성자아영혼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분류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성자아”, 혹은 인성이라는 말은, 보통 작은 자아, 제한적 자아, 유한한 자아, 삼계三界의 자아...등의 의미를 갖는데, 기술적으로 말하면, 육체적 경험과 인식, 감정 및 욕망의 경험과 인식, 지성적 분별의 경험과 인식이라는 세 종류의 경험과 인식이 어우러져 있는 존재 상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면, 중생들이 라고 인식하면서 집착하고 있는 존재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성자아와 대비되는 말인 영혼, 인성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경험과 인식 방식을 넘어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경험 및 인식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면, 깨달음, 각성, 지혜, 아라한의 의식, 근원적인 지혜...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중에, “신의 의지로 인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신지학이나 DK대사의 가르침에서 신의 의지라는 개념은 영혼 이상의 차원에서만 거론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신의 예정설내지는 운명론은 인성자아의 입장에서 제기되고 생각되는 것이지, 영혼의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는 개념입니다.

 

인성자아는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존재성이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성자아의 전형적인 환상이기도 합니다. 인성자아가 느끼는 자유의지는 단지 분리된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의 단절된 분리된 존재로서의 자신과 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비시키면서, 인간은 자신이 어떤 더 큰 세계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아니면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묻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의지나 운명론 같은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입장에서는, 그런 질문이나 문제제기 자체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영혼의 의식이라는 것은, 분리되고 단절된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성자아의 자각이 아니라, 광대한 차원의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의지나 운명론 같은 생각이 생길 수 없습니다.

 

과거 전통적인 접근과 신지학이나 DK대사의 가르침의 중요한 차이점은, 전자는 인성자아의 위치에서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후자는 영혼의 위치에서 인성자아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영혼의 세계를 조망한다는 것입니다. 인상자아의 위치에서 바라보느냐, 영혼의 위치에서 바라보느냐는 매우 다른 결과를 생기게 합니다.

 

전통적인 불교적 접근이나 다른 종교의 접근은, 인성자아의 위치에서 영혼을 바라보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인성자아를 영혼에게 조율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깨달음을 강조하고, 삼사라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 그 예들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신도들이 인성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었고, 소수의 발달된 수행자들은 어떻게든 영혼의 세계에 도달해야 할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소수가 경험한 영혼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인성자아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수용됨으로써, 수많은 혼란과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영혼의 세계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없이, 영혼의 세계를 인성자아의 위치에서 해석하고 수용할 때, 다양한 기능들이(특히 지성적 분별력이) 골고루 발달되지 못해서, 균형을 결여하고 있고, 정제되지 않은 인성자아는 영혼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왜곡과 변형이 발생합니다. 불교나 기독교에서 보이는 병적이고 미신적인 많은 믿음들과 견해들에서 그 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세속적 삶에 대해 고찰할 때, 그것을 인성자아의 입장에서 고찰하는가, 아니면 영혼의 입장에서 고찰하는가에 따라 매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DK대사의 가르침은, 어느 정도 성숙한 인성자아를 형성해서 영혼과의 조율을 시도할 단계에 와 있는 열망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여기에서 성숙한 인성자아의 중요한 특징은 분별력을 핵심적인 특징으로 하는 지성적 기능이 어느 정도 충분히 발달된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감정적인 욕망 충동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세속적으로 건강한 삶은 영혼의 위치에서 인성자아를 바라보고, 삼계를 바라볼 수 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은 거의 불가능하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의 입장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기 전에는 어떠한 올바른 세속적인 삶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어떤 올바른 삶도 불가능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무지를 근본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으로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완전하게 건강한 삶은 불가능할지라도, 불완전하나마 부분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올바른 지성적 분별력입니다. 부처께서 팔정도八正道의 첫째가 올바른 견해(정견)”라고 가르치신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팔정도의 항목 하나하나가 올바른 삶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깊은 명상과 분별력을 길러야 건강한 삶에 대한 기준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륵 5중의 하나인 보성론에서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삶은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로 가득한 웅덩이 깊은 곳에 떨어져 있는 보석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 오물을 모두 제거하고 씻어낼 때, 오염된 적이 없는 순수한 보석은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투명한 분별력이 기능하기 시작할 때, 그 깊은 웅덩이를 뚫고서 보석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내비치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돌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6-07-08 (금) 11:05 11개월전
셋째와 넷째, 수동적으로 인성자아가 영혼과 반응한다, 능동적으로 인성자아를 영혼과 조율한다. 여기서 수동과 능동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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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6-07-18 (월) 18:10 11개월전
깨닫기전엔 그 어떠한 삶도 올바른 삶이 아니란 말씀은 예전 강의때도 한번 들어본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탐진치, 무지, 오욕 등에 물들어 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보면 될지요? 그러나 어쩔 수없이 인간은 그런 단계에서 끊임없이 갈고 닦아 영혼의 세계(깨달음)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총카파 대사께서도 논리로써 수순하는 승의의 진리를 긍정하신 뜻도 그런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그게 맞는지도 궁금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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