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기쁨, 지복

행복, 기쁨, 지복

 

행복, 기쁨, 지복을 구별하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첫째, 행복happiness은 정서 안에 존재하는데, 인성자아personality의 한 가지 반응이다.

둘째, 기쁨joy은 영혼soul의 속성으로, 정렬alignment이 이루어질 때 마음 안에서 실현된다.

셋째, 지복bliss은 영Spirit의 성질로서, 영혼이 아버지Father와 하나가 될 때까지는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깨달음은 인성자아가 영혼과 하나가 되는 단계가 먼저 이루어진 다음 실현된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이 지복의 성질에 대해 사유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한데, 그런 사람의 은유와 용어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이고personal 감각적 세계와 관련된다.

열망자는 자신의 행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후자를 언급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룹 의식, 그룹 결속, 모든 존재들과 하나됨의 결과로서 실현되어야 하고, 어쨌든 행복의 맥락에서는 해석될 수 없다.

행복은 인성자아의 낮은 차원의 성질을 갖는 어떤 부분 안에서 인성자아를 만족시키는 조건들에 부합하고 있을 때 생긴다. 그것은 육체적인 행복감이 있을 때, 자신의 환경 혹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만족감이 있을 때, 혹은 자신의 정신적mental 기회와 교제에 만족할 때 생긴다. 행복은 분리된 자아의 목표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혼으로서 살고자 할 때, 하위 인간의 만족은 무시되고, 우리의 그룹 관계들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접촉하는 이들의 영혼을 더 훌륭하게 표현하게 하는 조건들을 실현시키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다른 이들이 더 훌륭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들에게 기쁨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물질적 조건들을 더 낫게 하고자 할 때는 육체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혹은 우리의 현존이 그들에게 평화와 고양감을 줄 때는 감정적 영향을 줄 수 있고, 또는 우리가 그들을 자극해서 사고와 이해를 명료하게 하게끔 할 때는 지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기쁨인데, 우리의 행위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소유적이지 않았고, 그 열망자의 환경이나 세속적인 상태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악화가 감지될 때 필연적으로 행복의 많은 부분은 포기된다. 환경이 힘들고, “많은 출생births의 축적된 카르마가 압박하기 때문이고, 혹은 가족, 국가나 민족의 고통이 민감한 인성자아에게 중압감을 주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행복이나, (자신을 보호하는 욕망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있는) 이기적이면서 고립된 사람의 자기중심적 만족을 기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각한 인성자아의 고난과 불행의 한 가운데서 영혼의 기쁨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컬트적인 역설이기도 하지만, 진부한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다. 그리고 학도는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진리에 대해서 눈을 감거나, 환영의 베일 속에 숨어서 자기최면 상태에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열망자는 빈번하게 눈을 크게 뜨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을 배웠고,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에 어떤 분리의 벽도 세우지 않았다. 그는 깨어있고 살아있으며, 민감하고, 종종 고통을 겪는다.

그는 세상이 행복이라고 부르고 평화라고 부르는 것이 왜 자신을 버렸는지 의아해하고, 어떤 결과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묻는다.

 

------ “화이트 매직 논고에서


주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6-05-30 (월) 15:14 1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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