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행의 위험성과 세 종류의 죽음(2)

명상수행의 위험성과 세 종류의 죽음(2)  

명상은 현대적인 용어로 정의하면, 의식의 진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해탈, 자유, 구원, 지혜, 지복 등의 용어들로 정의했지만, 그런 용어들에는 공통적으로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이 내포되어 있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고 즐겁게, 두려움 없이 살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나 노력으로 명상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런 감정적 자유와 행복감은 명상의 부수적인 결과이지, 그 자체로 명상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감정적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노력을 기울일수록, 그만큼 더 고통스럽고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감정적 행복이라는 말만큼 허구적이고 모순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감정 그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감정적 위안이나 행복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의식의 진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해할 때, 명상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앨리스 A. 베일리는 바람직한 명상을 위해서 주의할 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직관과 본능 사이를 정말 신중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고, 지성의 낮은 측면들과 상위의 마음 혹은 추상적 마음 사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영혼이 실재, 그리고 다른 영혼들과 연결되면서 이루어지는 영감을 받은 발언과 세련되고 교양 있는 지성에 속한 상투적인 말들 사이에 경계선을 유지해야 한다.”
    
직관intuition은 영혼 혹은 상위의 추상적 마음abstract mind에 속한 기능이다. 본능instinct은 잠재의식subconsciousness에 속한 기능이다. 직관과 본능 사이에 지성intellect이라는 기능이 있다. 지성은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사고하고, 추론하고, 분석하고, 예측하는 등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지성은 그런 의미에서 노력을 요구하고, 의식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전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습관적으로 학습된 방식에 따라 오랜 시간에 걸쳐 습득한 지식들을 동원해서 사고한다. 그런 기능이 잘 발달된 사람을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는데, 일반적인 지성의 기능은 현재 의식적으로 적용되는 의식의 기능이기 때문에, 지성에게 있어서 본능과 직관은 동일한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본능은 동물성에 근거하고 있고, 인류의 매우 오랜 과거로부터 형성된 기능으로서, 생물학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동물과 공유하는 감정적 기능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동물적 직감, 본능적 직감이라는 표현들은 본능의 두 가지 기능을 보여준다. 전자는 육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후자는 낮은 단계의 아스트랄체의 감각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런 기능들은 잠재의식적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식consciousness 아래sub에 있는 기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굳이 노력해서 의식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기능이다. 요즘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식역하 지각subliminal perception도 그 범주에 속한다. 쉬운 말로 무의식적 지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능은 지성이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진행되는데,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가운데 지성이 본능의 작용을 의식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지성의 중대한 실수와 혼란이 발생한다. 본능을 직관이나 고차원적인 영적 인식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인류의 전반적인 진화 단계는 본능의 작용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본능은 자연스럽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특정한 육체적, 감정적 경험이나 지성적 경험, 심지어 상위 세계의 경험으로 인해서, 본능이 자극을 받는 경우가 발생한다. 건강한 사람은 육체의 기능을 전혀 의식하지 않지만, 질병에 노출된 사람은 숨 쉬는 것조차 의식적으로 해야 하고, 심지어는 눕거나 앉아있는 것조차 집중해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건강한 사람이라도, 섬세한 무용이나 운동을 배울 때,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던 신체적 동작도 신경을 써서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습관적으로 의식적 노력 없이 하던 신체적 동작도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서 해야 한다. 그러면 지성은 육체적 경험을 매우 특별한 것으로 인식한다.
    
또한,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적 경험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없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의 감정적 반응은 자연스럽고 유동적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극심한 육체적 즐거움이나 고통, 관계의 즐거움이나 갈등, 경제적 만족이나 결핍,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등의 계기들로 인해서 감정적 경험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그러면 지성은 감정적 경험을 매우 특별한 것으로 지각한다. 그럴 때, 감정적 경험은 더 이상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의식적이고 노력을 요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인간의 지성은 평소에 전혀 지각하지 못했던 사건을 경험하면,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경험을 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지성이 발달된 사람들일수록 심하다. 지성이 발달된다는 것은 본능으로부터 그 만큼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던 본능적 반응들을 신기하고 특이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본능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본능적 반응들은 그 만큼 의식적으로 경험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한 성인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막 걸음을 배우고 있는 유아처럼 아장아장 걷는 것을 상상해보라. 혹은,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성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춘기 소년처럼 변덕스런 감정적 행동을 보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많은 명상들이나 종교적 생활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평상시에는 매우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업무에 종사하던 성인이 주말이면 특정한 교회에 출석해서 울고불고하면서 소리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정적 분출에 몰입해 있거나, 단순히 신체적 활동을 통해서 육체적 활력과 건강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감정적 경험이나 확장된 의식을 경험하기 위해서 다양한 신체적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자신도 모르게 지성을 내던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아무 생각 없이 본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본능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경험들을 의식의 영역에 불러내는 일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이나 최면요법 같은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그 정도가 심각하다. 무의식을 조사함으로써, 각종 트라우마, 콤플렉스를 드러내서 치유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발견해서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무의식은 되도록 의식의 영역으로 불러내서는 안 되는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본능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의미의 신비의 영역은 아니다.
    
육체적, 감정적 본능을 자극하는 명상수행들은 반드시 특정한 차크라를 자극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자극되는 차크라는 태양신경총 센터 혹은 마니뿌라 차크라인데, 육체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기법들은 성sex 센터 혹은 스와디스타나 차크라를 자극하기 쉽다. 특정한 차크라를 자극하면, 반드시 그 차크라 쪽으로 과도한 에너지가 집중되고, 집중된 에너지는 특정한 심리상태를 강화시키면서 의식의 불균형적인 상태를 발생시키고, 더 나아가서, 특정한 차크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분비선을 과도하게 자극하게 됨으로써, 특정 신체 기관에 문제를 일으킨다. 특정 차크라의 자극과 집중은 반드시 그 차크라가 대변하는 의식 상태를 실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어떤 차크라에 집중해서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의 순간에 의식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 본능과 감정적 본능을 자극하고 강화시키는 명상수행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본능의 반대 극단에 있는 것이 직관인데, 직관은 지성적 명상의 결과 경험되는 기능이다. 본능은 오랜 과거의 진화의 결과로서 자율신경처럼 작용하고 있는 반면, 직관은 아직 전혀 미발달된 영역에 있어서 일반적의 지성적 자각의 범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그 둘은 현재의 일반적인 지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서는 공통적이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에 있다. 낯설고 신기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반적인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와 영적 세계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서 수많은 오류와 맹신과 환영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관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성을 보완하고, 지성에게 길을 제시하고, 새롭게 개척해야 할 영역을 계시한다. 그러나 본능적 경험은 강화될수록 지성을 무디게 하고, 급기야는 지성을 부정하게 되어 있다.
    
지성이 무디어지면, 인간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그 다음에는 야만과 미신과 환영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지성이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육체적, 감정적 경험에 치중해서 진행되는 명상수행은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그런 명상수행에 호흡 수행pranayama까지 곁들이면, 그 위험성은 더 심각해진다. 호흡 수행의 핵심은 의식적으로 프라나를 흡수 순환 배출시키는데 있다. 프라나는 마치 연료와 같다. 연료는 집을 통째로 태워버릴 수도 있고, 난방과 식사를 해결해줄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관점으로 다가가느냐에 있다. 본능의 힘을 강화시키고 자극하는 방향으로 명상수행과 호흡수행이 병행될 때, 프라나는 본능적 기능들을 강렬하게 타오르게 할 것이고, 그 반대로 지성적 명상수행과 병행될 때(이런 호흡방법은 지성적 명상이 고도로 발달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가 없고, 그렇지 않은 상태로 행할 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고도의 의식의 변형을 실현시킬 수 있다.
    
감정적 위안과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신체적 건강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호흡 수련을 병행할 때, 그 결과는 정반대로 실현될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반적인 요가명상이나 명상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목격되는 감정적 예민함과 생활의 배타성은 그런 부정적인 수행으로 초래된 결과들이다. 감정적 민감성은 감정의 기복을 강화시키고, 그 결과 생활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배타성을 드러낸다. 자신도 모르게 오랜 시간 동안 마니뿌라 차크라를 자극해서, 감정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집중시킨 결과다. 더구나, 그런 명상을 특정한 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행할 경우, 그 영향력은 몇 배가 강화되기 때문에, 마니뿌라 차크라의 자극은 그 만큼 더 심해진다. 집단적 오라까지 형성되면,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당사자들은 그 문제조차 자각하지 못하면서 집단 최면 상태에 빠진다. 거기에 지적인 허영심에 근거한 자만심까지 곁들이면, 대책이 없게 된다. 실제로는 낮은 단계의 감정적 충만감에 도취되어서 퇴행적인 상태에 빠져 있을 뿐인데, 발달된 신학적 종교적 교리나 철학으로 치장된 지적인 허영심이 지배하면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고, 자신들이 어디에 빠져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외부에서 제시되는 비판이나 분석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런 명상수행이 의식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그것은 그대로 누구에게나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에 의식이 어디로 빠져나갈지를 결정하고, 그것은 곧 사후에 어떤 세계에 있게 되는지 결정한다면, 명상수행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정말 신중해야 한다.
    
참고로, 마니뿌라 차크라로 의식이 빠져나갈 경우, 사후에 그 사람은 낮은 단계의 아스트랄 차원에 집중되어 보내게 된다고 한다. 의식이 심장부위(아나하타 차크라가 아님)로 빠져나갈 경우에는, 높은 단계의 아스트랄 차원에 집중되어서 사후세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의식이 정수리를 통해서 나갈 경우에는, 육체의 사후에 곧바로 멘탈계로 진입하게 된다고 한다. 멘탈계는 데바찬Devachan이라고 불리는데, 삼계에서 진화하는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사후세계라고 한다.             

*출처- 직메의 서재 https://blog.naver.com/marmion0/2213997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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