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중관의 가르침은 견해를 세우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중국의 선지식 가운데 승조대사가 지은 '조론'은 공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송찬우 교수가 옮긴 '조론'의 내용을 간추려 적어본다.
1장은 '물불천론', 2장은 '부진공론', 3장은 '반야무지론', 4장은 '열반무명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의 요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물불천론 : 현상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 현상은 흐르지 않는다.
모든 법은 자체가 고요히 소멸하여 본래 스스로 발생함 없이 인연을 따라 나왔다. 그러므로 흘러 온 유래가 없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기 때문에 과거로 흘러가도 이를 곳이 없다.
사량분별이 의식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생멸유전하는 천류에 떨어지리라.
주관적인 인식의 사량분별이 끊긴 있는 현상 그대로의 현량이 드러나면 상대적인 말을 따라서 의미를 취하지
않는다.
진여법계가 완전하게 밝아지기만 한다면 시방세계가 담연하여 고요히 번뇌가 사라지리라.
부진공론 :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질은 진실로 없는 것이 아니다.
유-무의 상대적인 양쪽을 동시에 부정하고, 이를 통해서 유-무의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제일의제를 나타낸 것이다.
속제의 유는 진제의 무를 의지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있어도 실제로 있지 않으며, 진제의 무는 속제인 유의
인연을 따르기 때문에 없다 해도 실제로 없는 것은 아니다.
반야무지론 : 현상과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야는 앎이 없다.
반야는 고요함과 관조가 둘이 아니므로 유-무를 긍정적으로 간직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끊기도 하여, 긍정과 부정이 서로가 하나의 중도로 융합하였음을 말한다.
방편의 관조반야는 모든 상황에 감응하여 회합하면서 어긋나지 않고, 부딪치는 일마다 중도의 이치와
일치하면서도 이를 의식적으로 옳다고 여김이 없다. 실지반야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담박하여 작위가
없다. 그 때문에 앎이 없지만 모르는 것도 없는 것이다.
진제는 심오하고 현묘하여 반야의 지혜가 아니면 헤아리지 못한다.
경계가 다르다 해서 그 마음마저 다르지 않다. 때문에 경계가 마음을 따라서 하나이며, 하나의 동일함이
경계의 다름에 나아가서 동일하기 때문에 작용은 달라도 고요한 동일함은 다르지 않다.
제법을 반야로써 관찰해 본다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열반무명론 : 깨달음의 결과 ? 열반에는 언설(허망한 견해)이 없다.
두터운 생사의 근심 가운데서 가장 심한 것은 유를 탐하고 집착하는 변계소집의 허망한 마음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열반의 오묘한 도는 본래 언설이 없다.
법신은 세계와 번뇌가 고요히 소멸하였음을 지칭한다.
유-무를 일제히 하나로 관찰할 수만 있다면 객관의 세계인 사물과 주관인 내가 둘이 아니다. 이와 같다면
천지가 나와 함께 동일한 근본이며, 만물이 나로 더불어 하나의 자체이다.
대상인 육경의 세계와 주관인 심의식이 고요히 사라지고, 사물과 내가 여여하게 하나로 합하여
고요하게 조짐없음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중생이 생사에서 동일하게 벗어나 증득한 열반은 하나이다. 단지 중생의 근기에 대소의 차이가 있어
지혜에는 심천이 있다.
무위법을 극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승의 차이가 있다.
매우 깊은 십이인연의 강물을 건너면서 강물 밑바닥까지 다 밟고 건널 수 있는 것을 부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승은 이와 같지 못하여 마치 세 마리의 짐승이 강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세 마리의
짐승은 코끼리, 말, 토끼를 말한다.
최초로 보살지에 올라 법신에 계합하고 나서 진여의 이치를 증득하고, 칠지에 이르러서 근본장식을
단박에 버리고, 제팔 무상지에 이르러 평등진여를 증득해야 삼륜이 공적해진다. 그리고 십지에 이르러야
불과를 성취하게 된다.
보살이 공해탈문에 들어가고 나서 공을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고요하면서도 항상 관조하기
때문에 마음마다 적멸하고, 수행마다 진여에 계합한다. 그 때문에 움직여도 항상 고요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반야는 색온 가운데서 구하지 못하며, 역시 색온을 떠나서도 구하지 못한다.
적멸한 일심이 인연을 따라서 만법을 아루었고, 일심만법을 관조함도 일심일 뿐임을 열반이라 부른다.
불교의 깨달음은 허망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다. 연기가 공임을 자각함으로써 진정한 수행이 시작되고 지혜가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초지의 경지인 환희지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를 절감하며, 칠지가 되어서야 아뢰야식을 자각하게 된다고 하니 유식의 가르침이 결코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님을 또 절감한다. 나아가 삼륜이 공적해지는 경지는 적어도 팔지 보살이 되어서야 가능하다니 멀고도 멀게 느껴진다.
나모 부다야 나모 다르마야 나모 상가야
옴마니반메훔
옴아훔바즈라구루파드마싯디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