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카파의 저작인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마시모토 시로의 '티베트 불교철학'을 긴시간을 드려 읽으면서 중관이란 무엇인지 알음알이하게 되었다. 세속과 승의의 차이를 알 수 있다면 불교의 핵심을 아는 것일 것이다. 중관은 바로 승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가르침인 것이다.
총카파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관파에 주장이 있는가, 없는가를 고찰하는 것에 의해 '중관'이라고 말해지는 무언가를 구비한다면, '중관파'라고 불리는 그 무엇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승의로서는 미진만큼도 성립하지 않으며, 언설에 있어서는 일체는 환영과 같은 연기이다."라는 의미의 이해를 주장해야 하므로, 주장되어야 할 것은 중관파에 있어서 있는 것이다.
총카파는 찬드라키르티의 '무주장'설에 대해 기술 [46]과 [47]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46] 자성으로서 사물을 승인하는 주장이 없다는 것이 '무주장'이라고 설해졌다.
[47] '명구론'에서 "우리들에게 자기의 주장이 없기 때문에"라고 설한 것도, 자기의 종견이 없다는 것의 전거가 아니다. 이것도, 그것은 '자립의 주장이 없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언설에 있어서 자상에 의해 성립하고 있는 법을 인정하지만, 귀류파는 그것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시마토 시로는 티벳불교의 중관사상을 '이변중관설'이라는 입장에서 논술하면서 총카파가 어떻게 '이변중관설'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최후의 한마디를 덧붙혔다.
"공사상은 연기를 지시하는 한에 있어서만 불교적 의의를 가진다."라고 말이다.
깨달음은 공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추론적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추론적 방법은 분명히 견해를 확립하는데 분명한 도움을 준다. 더불어 견해가 확립됨으로서 비로서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견해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는 모든 수행론은 장님과 같은 것이다.
최고의 실재는 불가설이기 때문에 일체의 언어, 분별, 판단, 주장을 부정해야만한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인간은 유식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관자가 객관에 대한 경험을 먼저 한 후에 객관의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즉 식이 있음으로 인해서 외경이 가능해지고 세속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식을 실재로서 근거를 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식 자체의 근거를 묻는 것이 진정한 중관사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식 너머에는 분명히 실재인 그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반드시 실재를 경험한 자의 승인이 없이는 증득될 수 없다. 경전과 논서를 넘어서는 이야기인 것이다.
'범부', '성자', '부처'라는 세 개의 관점이 번뇌장과 소지장이라는 두 종류의 무명의 유무에 의해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다. 즉 '범부'에게는 색,수 등의 '제법'을 대상영역으로서 현현시키는 소지장의 무명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제법'을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번뇌장의 무명이 있다. 그렇지만 '성자'에게는 소지장의 무명만이 있기 때문에 '제법'을 진실로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 '제법의 자성'인 '공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에는 소지장도 없으므로 '제법'이 대상영역으로서 현현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는 '제법'이라는 기체를 결여하고 '공성'을 현증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깨달음의 길'에 있는 구절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씨앗이 존재한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씨앗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씨앗이 실체 혹은 자성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씨앗이 거짓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씨앗이 실재를 결여하고 있지만, 환영처럼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3) 씨앗이 진실한지 거짓인지 구분하지 않은채, 단순히 일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속심 안에 자성이 없음을 아는 견해가 계발되지 않은 유정들은 세 번째와 첫 번째 인식을 갖고 있는데, 말하자면 단순한 존재를 인식하고 자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물들이 본질이 없이 환영처럼 존재한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유정들이 제법이 환영처럼 존재한다는 견해를 얻기전에 그들이 제법에 대해 갖는 분별은 자성에 대한 분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제법에 자성이 없다는 견해를 발견하기 전에는, 그들이 단순한 있음과 자상으로 있음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론이라는 것은 지각에 의해 인도되는 장님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샨타락시따와 그의 추종자들은 숨겨진 대상들의 경우에 근본적으로 성립시키는 행위자는 결국 지각임을 승인한다. 그 시점에서 그들은 근본적인 자각이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전도되지 않은 인식이거나 전도되지 않은 자기인식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미 설명했듯이, 그들은 자성으로 존재하는 대상은 나타나는 것이고, 나타난대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어떤 것을 그들과 실체나 자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중관사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성립시키는 전도되지 않은 지각은 있을 수 없다.
전도되지 않은 지각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중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중에 핵심일 것이다.
옴마니반메훔
옴아훔바즈라구루파드마싯디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