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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불교수행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눕니다. 즉,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입니다. 보통, 지수행과 관수행이라 부릅니다. 요가적 표현을 빌면, 종자있는 명상과 종자없는 명상으로 나눕니다. 대승불교의 육바라밀 수행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수행이 바로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입니다. 금강승 불교에서 말하는 생기차제 명상과 구경차제 명상 역시 사마타 명상과 비파사나 명상의 밀교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 역시 그 안에 포함됩니다. 화두라는 대상에 대한 집중 명상이 사마타이고, 집중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통한 관의 경지에 들어서는데, 그것을 비파사나 명상이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사마타 명상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숱한 망상에 빠져서 삿된 길에 들어서 있는지도 모르고 왜곡됩니다. 불교 수행을 크게 계, 정, 혜의 삼단계로 나누는데, 계가 갖추어져야 정이 가능하고, 정이 가능해야 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이 바로 사마타 수행이고, 혜가 바로 비파사나 수행입니다. 현재 국내 불교수행자들 사이에 비파사나 수행이 많이 유행되어 있는데, 그들 비파사나 수행 거의가 상좌부 불교 계열의 미얀마식 비파사나 수행으로, 대승불교권의 비파사나 수행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불교가 대승불교이면서도 정작 대승불교권에서 말하는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대승불교권의 사마타 수행은 주로 유식학 계통의 경전과 논서들에 근거하고, 특히 아상가(무착)의 저서들에 많이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상가의 저서들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전혀 없고, 사마타 수행과 관련해서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승불교의 비파사나 수행은 주로 공성에 관한 이해를 말하는데, 용수를 선두로 하는 중관사상 계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들을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용수의 생애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용수의 중관 관련 논서들은 반야부 경전의 핵심 주제인 공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저서들입니다. 사실상 불교의 진면목은 사마타 수행보다는 비파사나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공성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분석과 통찰을 초석으로 해서 공성에 대한 명상과 그로 인한 공성의 체득이야말로 부처의 대승적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방대한 경전들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참고해야 할 것이 논서들인데, 중관계열의 논서들과 유식학 계열의 논서들입니다. 현재, 유일하게 그런 전통이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는 곳이 바로 티벳불교입니다.
간화선을 말하는 국내의 수행승들이 공성에 대한 이해에서 상좌부 계열의 무아론을 함부로 적용하는 것도 알고 보면 중관/유식 계통의 논서들을 공부하지 못한 데서 유래합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위시한 타종교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 역시 중관 유식에 관한 이해, 특히 중관사상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어서, 공성에 대한 소박한 감성적 이해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때는, “저 사람이 불교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의 차이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사마타 수행의 체험을 공성과 혼동하기까지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결코 부처의 일체지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할 수 없고, 근본적인 번뇌를 없앨 수도 없고, 불교 외의 다른 종파에서도 공유하는 것이라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불교 공부에서 또하나의 문제점은, 여래장적인 불교 이해인데, 중관과 유식을 전제로 한 여래장이 성립될 수 없듯이, 중관과 유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함부로 여래장을 말하면, 불교 아닌 불교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결과가 신인합일류의 불교적 깨달음관입니다. 기독교적 신관념이 배어나는 “마음”이니 “본래마음”이니 하는 말들 속에서 공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결여되어 있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이 마음에 비롯되었다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그대로,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만물이 비롯되었다는 기독교적 창조론 비슷한 결론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사마타 명상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숱한 망상에 빠져서 삿된 길에 들어서 있는지도 모르고 왜곡됩니다. 불교 수행을 크게 계, 정, 혜의 삼단계로 나누는데, 계가 갖추어져야 정이 가능하고, 정이 가능해야 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이 바로 사마타 수행이고, 혜가 바로 비파사나 수행입니다. 현재 국내 불교수행자들 사이에 비파사나 수행이 많이 유행되어 있는데, 그들 비파사나 수행 거의가 상좌부 불교 계열의 미얀마식 비파사나 수행으로, 대승불교권의 비파사나 수행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불교가 대승불교이면서도 정작 대승불교권에서 말하는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대승불교권의 사마타 수행은 주로 유식학 계통의 경전과 논서들에 근거하고, 특히 아상가(무착)의 저서들에 많이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상가의 저서들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전혀 없고, 사마타 수행과 관련해서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승불교의 비파사나 수행은 주로 공성에 관한 이해를 말하는데, 용수를 선두로 하는 중관사상 계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들을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용수의 생애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용수의 중관 관련 논서들은 반야부 경전의 핵심 주제인 공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저서들입니다. 사실상 불교의 진면목은 사마타 수행보다는 비파사나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공성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분석과 통찰을 초석으로 해서 공성에 대한 명상과 그로 인한 공성의 체득이야말로 부처의 대승적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방대한 경전들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참고해야 할 것이 논서들인데, 중관계열의 논서들과 유식학 계열의 논서들입니다. 현재, 유일하게 그런 전통이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는 곳이 바로 티벳불교입니다.
간화선을 말하는 국내의 수행승들이 공성에 대한 이해에서 상좌부 계열의 무아론을 함부로 적용하는 것도 알고 보면 중관/유식 계통의 논서들을 공부하지 못한 데서 유래합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위시한 타종교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 역시 중관 유식에 관한 이해, 특히 중관사상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어서, 공성에 대한 소박한 감성적 이해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때는, “저 사람이 불교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의 차이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사마타 수행의 체험을 공성과 혼동하기까지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결코 부처의 일체지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할 수 없고, 근본적인 번뇌를 없앨 수도 없고, 불교 외의 다른 종파에서도 공유하는 것이라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불교 공부에서 또하나의 문제점은, 여래장적인 불교 이해인데, 중관과 유식을 전제로 한 여래장이 성립될 수 없듯이, 중관과 유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함부로 여래장을 말하면, 불교 아닌 불교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결과가 신인합일류의 불교적 깨달음관입니다. 기독교적 신관념이 배어나는 “마음”이니 “본래마음”이니 하는 말들 속에서 공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결여되어 있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이 마음에 비롯되었다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그대로,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만물이 비롯되었다는 기독교적 창조론 비슷한 결론까지 나올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