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께서 설파하신 가르침은 어찌 보면 인류가 낳은 지극히 위대한 진리의 가르침이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의 일반 불교학도들에게 있어 매우 어려운 난관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료의 부족입니다.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듣는 이들의 근기와 업에 맞추어서 설해진 상황설법이 많다 보니까, 무엇인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고, 무엇이 최종적인 깨달음의 길인지 결정하기가 힘듭니다. 한국 불교는 천 오백년의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향에서 연구가 빈약하고, 선종의 영향이 너무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지난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의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서 불교가 그나마 국민의 대표적 종교로서 존속되고 있는 것도 놀라울 정도이고, 일제 식민지 기간과 해방 후의 미국 편향의 사대주의적 정책과 국민의식은 그나마 불교의 침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천 오백년(일설에 의하면 교과서에서 거론되는 불교 수입시기보다 훨씬 더 오래라고 합니다)이 넘는 불교의 역사가 있음에도, 현대에 와서 불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종교든 있게 마련인 세속적 권력의 개입과 독단성과 형식적 종교행위를 문제시할 수 있겠지만, 혹자는 불교 역시 외래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불교의 문제점은 접근의 어려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 불교의 종지라고 하는 간화선 전통이 현대에 와서 상당히 무리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전통이라는 것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화두니 선문답이니 하는 식의 법문과 서적들 밖에 찾을 수 없는 일반불교도들에게 있어 가장 문제점은 체계있는 교학과 수행지침입니다. 소승, 대승, 금강승(밀승)이라는 것에 덧붙여서 간화선이라는 중국태생의 한국 수행전통이 혼재되어 있어서 어느 것에서 시작해야 할지, 어느 것이 부처의 정법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행 중심으로 가는 많은 승려들이 이미 상당수 미얀마식의 소승적 수행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 상황입니다. 간화선도 예외 없이 대승불교에 속한 전통인데, 문제는 대승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빈약한 것이 한국 불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류의 다양한 대승경전을 간화선류의 접근법으로 풀어가는 것도 문제거니와 충분한 교학적 훈련이 없이 풀어가는 법문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말 그대로 선문답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제 그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것은,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미얀마의 소승적 접근방법을 동원해서 해석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미얀마의 상좌부 계통에서는 대승이나 밀승 같은 것을 인정도 하지 않거니와 심지어 대승권이나 밀교권에서 받은 계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일부의 승려들과 불교도들이 밀승에서 해답을 찾고자, 호기심반 구도심반으로 티벳불교에 관심을 갖는데, 그 역시 언어의 한계와 교학적 훈련이 결여되어서 수박겉핥기식 공부로 끝나거나 검증되지 않는 광고성 신비주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불교승려들이 힌두의 요가전통이나 도교전통에 속한 선도수행을 하면서 승복만 걸친 승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 불교도들은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속신앙 내지는 점복신앙과 불교를 혼동하고 있는 사이비 승려들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절은 커지고, 불상은 커지지만, 불교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곳은 더욱더 줄어들고 찾기가 어려운 것이 한국 불교의 현주소입니다.

일찍이 부처 열반 이후 인도에서는, 방대하고 다양한 부처의 가르침에 체계를 세우고 순서를 정해 후세 수행자들과 신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창시자가 설한 구전 가르침에 체계를 세우는 노력들이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대승불교에 있어 그런 노력은 인도의 많은 논사들을 통해서 진행되었습니다. 대승적 부처의 정법을 세우고자 하는 노력의 선두 주자는 다름아닌 용수, 즉 나가르쥬나였습니다. 그의 “중론”은 대승적 깨달음의 최고경지인 공성에 대한 견해를 세우는데 있어 필수적인 저서입니다. 용수를 잇는 많은 논사들이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무착(아상가)과 세친(바수반두) 두 형제의 창조적 노력은 대승불교를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의 교학적 전통(과거 인도의 교학적 전통은 현대의 학문 중심의 단절된 접근이 아니라, 수행을 반드시 겸하고 있는 전통입니다)의 모든 노력은 결국 부처의 정법이 무엇인지, 어디서 시작하고, 다음 단계가 어디인지,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가 무엇인지 체계를 세워서 삿된 길에 빠지지 않고 공부와 수행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불교에서는 그런 전통을 현대에 와서 찾아보기가 어렵고, 한국의 승려들은 중론이 무엇인지 공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현시점의 문제는, 다분히 중국 중심의 불교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계종의 간화선 전통은 교학연구에 대해 “부질없은 알음알이”라고 부정적으로 폄하해버려서, 결국에는 무식한 수행승들이 검증되지 않은 어설픈 깨달음을 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불교경전의 문제점입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라는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으로 정리된 불교경전이기에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전문적 승려들조차도 읽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과거 한문이 식자층의 문자였을 때에조차도, 상당한 한문실력과 학문적 소양을 갖춘 학자들이나 읽을 수 있었던 것이 한문경전이었습니다. 현대의 일반불교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천재였던 율곡 선생조차 한문경전을 처음 접해 보았을 때,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감도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국 역경원에서 삼십여년 동안 한글 번역이 진행되었는데, 읽어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한문어에다 한글 토씨만 붙인 작업이라서, 역시 읽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뜻글자인 한문으로 기록된 불교경전을 소리글자인 한글로 옮기는 작업은 천오백년이 넘는 전통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십 년의 번역노력이 무기력한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중국의 불경은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 경전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가 읽는 경전은 여전히 우리의 글이 아닌 중국의 언어로 기록된 경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살아있는 한국인들 거의가 한글화되어 있는 의식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불교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그 안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지침이 있고, 인간이 가야할 정도가 무엇인지, 이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침이 있고, 다양한 수행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는 놀라운 전통입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다른 종교와 달리, 부처의 뒤를 잇는 기라성 같은 위대한 수행자들이 그 맥을 계승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 불교권의 스승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종교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위대한 경지를 성취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부처의 제자들이었고, 부처의 맥을 잇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성취자들의 힘으로 부처의 가르침은 인류의 보편적 영적 전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라바츠키의 신지학은 어찌 보면 서구인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앨리스 베일리조차 철저하게 서구인들을 위해 저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불교적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습니다(앨리스 베일리의 스승인 DK대사는 스스로를 티벳의 고위 라마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입니다).